의료사건 장기미제 많은데
신체감정 등 후순위로 밀려
“전공의 부족에 처리 지연”
의사들, 헌법소원도 준비
행정소송에 장기화 우려
“전공의 사직 사태 이후, 신체 감정 날짜가 잡힌 게 없다. 전공의 사직이 장기화되면 신체감정이 필요한 관련 소송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된다.”
법원과 변호사 업계가 최근 전공의 및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의료 사건 처리가 늦어져 재판 속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의대 정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기 시작한 지 한달 만에 의대 교수들까지 사직 행렬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법원의 감정 요청이 후순위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편 당사자인 전공의 단체에서 행정소송 및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예고하며 ‘의료 파국’ 사태가 법원과 헌법재판소까지 옮아가는 모양새다.
장기미제 의료 사건 더 늦어질수도
의료 감정이 필수인 의료사건은 난이도가 까다롭고 다툼이 첨예해 장기미제가 많다. 전문 감정이 지연되면 재판 기간도 늘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단독 재판부에서 계류 중인 의료전담사건은 △2020년 275건 △2021년 273건 △2022년 273건이었다가 지난해 296건으로 오른 뒤 올해 들어 이달 13일 기준으로 306건에 달한다. 같은 법원의 의료전담 합의재판부 미제사건 건수도 지난해 기준 86건이다. 그나마 민사합의부의 사물관할이 소가 기준 5억 원 초과로 변경돼 건수가 다소 감소한 영향이다. 합의재판부 미제사건은 △2020년 164건 △2021년 156건 △2022년 113건으로 100건 이상 쌓여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법원에서는 의료감정비를 증액하기로 했다. 감정에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달 19일 대법원 예규 범위 내에서 법원 내규를 개정해 병원에 의료 감정을 요청할 때 감정 문항 수에 따라 의료감정비 증액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신설하고, 감정의 난이도에 따라서도 증액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 감정’은 신체감정과 진료기록감정으로 구분된다. 신체감정은 직권 또는 당사자의 신청에 따라 감정촉탁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보아 법원이 감정채택결정을 하면 감정인선정전산프로그램에 의해 무작위로 감정인(감정촉탁기관 및 담당의사)을 선정하고 감정촉탁한다. 진료기록감정은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도 감정을 촉탁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신체감정’이다. 전공의가 사직할 경우, 일반 전문의나 의대 교수들은 본업인 의료 행위도 우선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만큼 법원의 감정 요청이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법조계에선 현재 상황에서 의료사건 감정이 늦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지적한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지금처럼 전공의나 교수들이 업무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의료사건 심리에 있어 결정적 증거인 진료 기록 감정 신청에 대한 회신이 늦어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결국 재판지연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료사건을 주로 다루는 한 변호사도 “진료기록감정의 경우 작성자명은 교수로 되어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대체로 전공의가 작성할 때가 많다”며 “전공의들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교수도 본업이 아닌 감정 촉탁을 받기에는 부담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복지부 상대 행정소송 제기문제는 의료 현장 혼란이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공의 단체에서는 19일 서울행정법원에 보건복지부장관을 상대로 입학정원 증원처분 등 취소소송과 함께 집행정지 신청을 냈다. 조만간 헌법소원심판도 청구할 예정이다. 정부의 조치가 헌법상 명시된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했다는 취지다.
전공의 측에 법률 자문을 제공하는 조진석(43·변호사시험 2회) 법무법인 오킴스 변호사는 “정부가 내린 집단 행동 금지 명령, 교사 금지 명령, 업무 개시 명령, 진료 유지 명령,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등은 전공의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그 자체로 위헌이자 위법일 수 있다”며 “이는 개인의 직업 수행 자유 등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하고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이러한 행정명령들이 위헌·위법 소지가 커 처분 당사자인 전공의 내지는 젊은 의사들이 헌법소원 제기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파업 강제성 여부 따라 유무죄 갈려
앞서 의료계 집단행동 후 과거 사법처리가 이뤄진 사례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집단행동을 강제했는지 여부에 따라 유무죄 판단이 달라졌다. 과거 정부의 2000년 의약분업, 2014년 원격 진료 및 영리병원을 추진에 반대하며 집단행동을 주도한 당시 대한의사협회 회장 등은 의료법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00년 파업을 주도한 김재정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대법원에서 확정받았으며, 2014년 집단휴진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노환규 전 협회장은 무죄를 확정받았다.
한수현 기자 shhan@lawtimes.co.kr
박수연 기자 sypark@law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