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채용 안 되자 상실감…
업무스트레스가 사망의 원인
수습기간 중 극단적 선택을 한 변호사에게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왔다. 변호사의 업무 특성상 고도의 지적 노동과 책임이 수반되지만, 이러한 직무 스트레스가 심각한 정신적 문제로 이어질 경우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박정대 부장판사)는 지난 6월 수습 변호사로 근무하던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한 A 씨의 아버지 B 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2022구합85041)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A 씨는 2021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후 같은 해 5월부터 서초동의 한 로펌에서 수습 변호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B 씨는 아들이 수습 변호사로서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우울증이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공단은 2022년 8월 "실무 수습 과정의 경우 본인의 책임이 뒤따르는 업무라기보다는 법률적 쟁점에 대한 검토와 문서 작성으로 A 씨가 겪은 업무 부담은 통상적인 수준"이라며 "정규직 전환 불가는 수습 계약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유족급여 지급을 거부했다. 또한, 공단은 A 씨가 로스쿨 재학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점을 들어 자살의 원인이 개인적 요인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불복한 B 씨는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과도한 업무 환경이 A 씨의 우울증을 악화시키고 결국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한 주요 요인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 씨가 수습 변호사로 근무하면서 상시 야근과 주말 근무를 했다"며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A 씨가 남긴 유서를 주목했다. 유서에는 "변호사로서의 업무가 내 능력을 넘어섰으며 내가 맡은 일들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A 씨는 자신이 정규직 변호사로 전환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과 변호사로서의 책임감이 스스로에게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언급하며 이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음을 시사했다.
법원은 A 씨의 정신건강 진료 기록도 주요 증거로 채택했다. 재판부는 "A 씨는 로펌에서 근무한 지 약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우울증 증세가 악화되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했고 이후 약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며 "변호사 업무의 특성상 고도의 지적 노동과 책임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업무 환경에서 A 씨가 받았던 정신적 압박은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A 씨가 겪은 업무 스트레스가 극단적 선택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A 씨는 로스쿨 시절 우울증이 있긴 했으나 졸업 후 변호사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증상이 호전되었다"며 "로펌에서의 업무 환경과 스트레스가 기존 우울증을 다시 악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A 씨는 변호사로서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지 못한다는 정신적 부담 끝에 정규직 변호사로의 채용이 좌절되자 극도의 상실감을 받았다"며 "결국 정상적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떨어져 합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다"며 업무 스트레스와 사망 간의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시했다.
한편 서울행정법원은 6월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도 근로자로 인정될 수 있다고 판결한 바 있다(2022구합82813). 파트너 변호사라도 로펌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주요 경영 사항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근로자로 볼 수 있으며, 과로로 사망할 경우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순규 기자 2024-10-23 05:06